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시인,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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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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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남인을 천주교 신봉을 구실로 섬멸하고자 한 사건)에 연루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약용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28세 때 전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 39세에 형조참의를 사직할 때까지 벼슬살이를 했던 사환기이며, 제 2기는 40세에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 장기와 강진에서 18년간 지냈던 유배기요, 제 3기는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75세까지 살았던 소요자적기라 할 수 있다
순서
설명
그는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였고, 23세에는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18년간의 유형에서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도 일체 출입을 금하고 48권에 달하는 (牧民心書)를 완성하였으며, 75세를 일기로 마현 사제에서 조용히 서거하였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
천주교로 인하여 나라가 떠들썩할 즈음 주문모(周文謀)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정약용의 자는 미용(美庸)이요, 호는 사암(俟菴)․다산(茶山)․자하도인(紫霞道人)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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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고,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물렀다. 두 번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땅이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었으며,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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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1762년 광주군 초부방 마재의 소내에서 태어났다. 이로 인해 세상이 더욱 떠들썩해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다산은 강진으로 이배되어 이 후로 18년간을 이 촌락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정조가 죽고, 정약용은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 되었다. 이 당시 다산은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 재원이며 모친은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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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촌민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천연두를 고쳐 주고, 종두술을 지어 백성을 가르치고, 농민생활을 속 깊이 observe했고 그 대책을 경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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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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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22세 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의 측근에서 연구와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정치, 사회적 폐단이 크게 드러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