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옥에 손님 오니 연기가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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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2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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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31세가 되던 정조 23년(1799)에 실시된 알성시의 문과 응ㄹ과에 합격하여 이듬해 4월에 의政府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8월에 서판관이 되어 북경으로 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는 없어져 가는 악부를 보존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그림에서는 남종화(南宗畫)의 기법을 전승받아 이를 유행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10년동안 계속 한직에 머물게 되자, 시사에 대한 논평이 집정자의 미움을 사서 보외되었다가 순조11년(1811)에 비로소 내직으로 옮겨 정이품에 올랐다. 신위의 가계는 세대에 걸쳐 학자, 문인, 장군, 예술가 등이 많이 배출된 서울의 귀족이었다. 따라서 1816년 과찬으로 승지가 되어 환조하게 되자, 곡산의 부노(父老)들이 길을 막고 계속 그 고을을 다스려 주기를 간청하였다고도 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호는 자하(慈霞), 경수당(警修堂),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시와 서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그는 한국적인 특징을 시에 많이 남기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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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세에 취학하여 시, 서, 화를 익혀, 진작 재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여 이른바 삼록(三록)의 터전을 닦았다. 이 몸이 쓸모없어 동녘으로 왔는데 강산이 아름다워 이몸을 위로한다. 백성 가난하고 땅 메말라 가족 더불기 어려우나 고기 살찌고 채소 향기로와 잔 잡을 만하오. 선옹(仙翁)이여 고맙소 이 기회를 빌려주니 금강산 가까운 십주(十洲)의 소식이라오. <신위전집 1.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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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자하 신위(慈霞 申緯,1769~1845)는 조선조 한시문학의 봉우리를 점령한 후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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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선후기 우리 culture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되거나 알겨진바가 적어 자세하게 그의 문학 및 예술세계를 탐구해본 적이 없는 것을 반성하며 그가 자라온 배경과 시대상황 및 그의 작품세계, 그리고 그의 작품의 특징까지도 함께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신위는 선정을 베푸는 여가에
다. 하지만 벼슬길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오르게 된 자리를 사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서 돌아와 이듬해 곡산부사로 연임되었는데, 전염병으로 피폐된 고을을 구하고자 세금과 부역을 장감해 줄 것을 조정에 고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내직으로 돌아왔으나 당쟁에 배겨내지 못하고 다시 춘천부사로 보외되니, 그의 나이가 이미 50세가 되었다.
신위(申緯)는 1769(영조45)~1845(헌종11)에 살았던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화가, 서예가이다. 그는 4,000여 수의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시, 서에 있어서도 뛰어난 솜씨를 지녀 국내는 물론이요, 청과 Japan에까지 그 성명이 널리 알려진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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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미루어 당시 춘천은 토지가 메말라 산물이 풍족하지 못해 부민들의 생활이 곤궁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가족들과 함께 부임하지 못했음도 알 수 있다. 고인도 오히려 면하지 못한 일 하물며 옹졸한 나 마땅하다 말다.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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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위의 생애와 시대배경
위정자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백성의 민심을 이해하고자 하여 벼슬에 올라간 뒤에도 세금문제와 농민생활 등을 돌아보고 조정에 그 상황을 아뢰는 모습을 보였다.